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회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스무 명 남짓한 소수가 모여 기도했습니다. 열한 제자와 예수님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여 기도합니다. 처음 기도회 장면을 주목해 보십시오. 기도회를 이끌려면 분명 누군가가 주도해야 합니다. 그냥 모이기만 하면 자연 기도회가 됩니까? 앞장선 누군가가 있기에 기도회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겠습니까? 분명 처음에는 사도들이 주도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흐르며 기도회 인원이 늘어났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백이십 명을 아우르는 규모로 성장합니다.
그러니 어떤 이들이 그 기도 모임에 합세했겠습니까? 그들은 기도 모임에서 누구를 의식하겠습니까? 까놓고 제자들보다 예수님 형제들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예수님 어머니인 마리아까지 함께한 기도회입니다. 분명 예수님 형제들은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여전히 주도권이 사도들에게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형제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형제인 야고보는 "낙타 무릎"으로 알려진 기도용사였습니다. 그러니 기도회를 이끌 최적임자는 누구겠습니까? 제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형제, 특히 야고보입니까?
어떤 공동체이든 보이는 조직과 보이지 않는 조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다락방 기도회에도 있었을 두 조직을 떠올려보십시오. 실세와 비선 실세 중 누구에게 더 아우라가 있겠습니까? 한창 기도회가 뜨거울 무렵 베드로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불쑥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게 이루어진 심판을 말합니다. 아울러 그 자리를 대신할 일꾼, 곧 사도 충원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두 사람을 추천합니다. 기도 후 제비뽑기라는 선출 방식으로 맛디아를 택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선출 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군가는 예루살렘 교회 출범 전에 이루어진 체제 정비라고 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성령 개입이 없었으니 잘못된 결정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은 사도 바울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주권과 함께 기도회가 놓친 신학의미를 찾습니다. 채워질 사도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실 주권적 역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약속을 기다린다며 기도하는 그들 아닙니까? 기도를 마치 만사형통이나 되는 양 우겨대는 논리에 속지 마십시오. 기도가 때로는 하나님 주권을 건드릴 때도 있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래서 기도는 언제나 삶과 죽음, 그 경계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보다 마가는 다락방 기도회 전모를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훗날 성령 역사를 의식하며 그날을 떠올려봅니다. 왜냐면 마가에게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이 세우신 사도가 맞습니다. 그 바울이 평생 놓치지 않은 주제어가 십자가이며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예수님 흔적이 있습니다(갈 6:17). 그 바울 복음을 성찰하자니 무게중심이 부활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바울이 못다 그린 십자가 의미를 마가가 채워갑니다.
한국교회가 택한 공적 예배용 성경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대다수가 개역개정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은 마침표나 물음표, 느낌표 등 문장 기호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모호할 때도 더러 있습니다. 물론 이를 보완하는 장치가 있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아쉽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려면 다른 번역 성경도 필요합니다. 가능하면 영어성경 한두 권 정도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다행히 한글번역본도 종류가 많아졌습니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 쉬운 성경, 우리말 성경 등등 여럿 있습니다. 이런 번역본을 참고해서 마가복음을 보십시오. 그러면 마가복음에는 유난히 "?", 곧 물음표가 많음을 봅니다. 이를 문장형식으로 말해 보십시오. 의문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논점은 수사적 의문문입니다. 어떤 문장이 수사적 의문문인가를 살펴보십시오. 마가복음은 질문으로 가득 찬 복음서입니다. 이를 통해 마가복음이 던진 수사적 질문이 무엇이라 보십니까? 마가복음은 줄곧 한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그러니 마가복음이 던진 그 질문을 찾아냄이 관건입니다. 왜냐면 마가복음을 끝내려면 그 질문을 찾고 답해야 하니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전체가 온통 질문으로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 질문 중 어떤 질문이 수사적 질문인가에 주목하십시오. 다시 말해 복선을 깔고 있는 질문에 주의하십시오. 마가복음 전체 구조는 갈릴리 사역과 예루살렘 사역으로 나뉩니다. 통상 갈릴리 사역을 전반부, 예루살렘 사역을 후반부로 부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루살렘 사역은 고난이라는 한 주제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역을 설명하는 내용은 역사처럼 읽으면 됩니다. 반면 갈릴리 사역은 역사보다 신학적 의도에 따라 재배치됩니다. 그렇게 마가는 흩어지는 교회라는 갈릴리 교회 특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며 교회 원리를 구성합니다. 그 결과 용서와 영적 치유, 그리고 기쁨의 원리가 교회 됨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최후 보루는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막 2:23-28). 제자들이 길을 열고자 이삭을 자르자 바리새인들이 맹공격합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성토하듯 "어찌하여"를 퍼부어댑니다. 그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아예 없다는 식으로 안식일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예수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기세등등합니다. 그렇게 밀밭을 두고 안식일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 논쟁에서 예수님이 하신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안식일 의미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안식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명제만 말하겠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출 20:11). "거룩함"은 안식일과 연관된 명제 중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인자"가 곧 안식일의 주인임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이 직설화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한, 그날이 어떤 날입니까? 예수님은 안식을 가리켜 안식일에도 주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에 담긴 예수님 정체성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이렇게 드러냈습니다. 사람의 아들인 인자가 곧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교회는 그 예수님이 중심에 계신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떻게 말해도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아니 거룩하지 않다면 그 어떤 교회도 사실은 교회가 아닙니다. 간판은 그럴싸하게 교회라고 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지 않으면 교회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용서와 사랑이 넘친다고 해도 거룩함이 없다면 어떻습니까? 영적 치유와 기쁨과 즐거운 한마당이 교회라도 말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교회일 수 없습니다. 교회 종탑을 삐죽이 세우고 십자가 조명을 밝힌다고 교회겠습니까? 교회는 어떤 경우라도 거룩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라는 말만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샌가 슬그머니 거룩함과는 멀어진 현대교회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주인인데 그 주인이 교회에 없다면 어떻습니까? 거룩함은 그저 말장난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인이 된, 갖지 않은 교회가 어디 한둘입니까? 도무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이상한 공동체가 어디 한둘입니까? 그러니 설교자에게는 목사인지 야바위꾼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도 예배자인지 싸움꾼인지 되묻게 됩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그러니 차제(此際)에 우리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인지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 질문이야말로 마가가 우리에게 던진 물음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용서가 살아있습니까? 영적 치유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잔치 한마당입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한 가지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한 가지가 바로 "거룩함"입니다. 그러니 다시 묻습니다. 우리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까? 그 거룩함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