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 관점에서 유다왕국 멸망은 단지 한 국가 소멸에 불과합니다. 국가는 흥망성쇠라는 필연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유다 소멸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정치 역사학으로 유다를 살펴봄은 그리 새로울 게 없습니다. 반면 종교사 관점에서는 신기원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유다 멸망을 계기로 신흥 종교인 유대교가 등장합니다. 유대교 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입니다. B.C. 586년 바빌론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성전을 초토화합니다. 그렇게 솔로몬 성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문제는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입니다. 그들은 성전 없는 예배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물론 선지자 다니엘처럼 기도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 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는 개인 경건일 뿐 전체 백성과는 무관합니다. 그런데 천년만년 가리라 여겼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바빌론 병사들은 돌이란 돌은 다 뜯어냈습니다. 아예 재건축이 어려울 정도로 철저하게 깨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 광경을 모두가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 땅으로 끌려왔습니다. 앞서 붙잡혀온 포로들에게 성전파괴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니 듣는 이마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성전이 무너졌는데 예루살렘 쪽을 향해 기도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유다 백성 역시 북이스라엘 전철을 밟는 듯했습니다. 북이스라엘 열 지파는 끝내 민족 정체성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열 지파는 이방 민족에 흡수되어 해체와 소멸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니 유다 백성 역시 결국엔 주변 민족에 동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체될 줄 알았는데 그들은 되려 유대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성전 파괴로 인해 성전예배는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민족 정체성을 고추세울 수 있었습니까? 그 비밀은 성전예배를 대체한 새로운 예배에서 비롯됩니다. 그 예배가 곧 회당예배입니다. 1차 포로로 바빌론에 붙잡혀 온 지식인 집단이 각성합니다. 유다가 멸망에 직면한 위기 상황을 곱씹어 되새겨봅니다. 처절한 자아 성찰과 함께 새로운 비전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가 유일신 사상(唯一神 思想)입니다.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그 당연한 진리를 확인하자 위기를 넘어 소망을 말하게 됩니다. 그 소망이 이른바 "메시야 대망"입니다. 그렇게 성전예배를 대신한 회당예배를 승인합니다. 회당예배는 성전예배와 달리 희생 제사가 없습니다. 그 대신 율법을 비롯한 성경을 읽고 훈련받는 교육이 강조됩니다. 과거 율법은 제사장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랬던 율법을 일반인에게까지 펼쳤습니다. 여기에 선지서라는 이름으로 성경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성경 교육은 자연스레 새로운 지도자, 곧 랍비라는 제도로 이어집니다. 성경이 대중화되며 회당(Synagogue)마다 율법 낭독으로 열기를 더합니다.
이후 이른바 스룹바벨 성전이란 이름으로 성전이 복원됩니다. 하지만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지성소에 있어야 할 법궤 - 정확하게는 계명이 쓰인 돌비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성소라지만 지성소답지 못합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계명의 돌비가 없는데 어떻게 지성소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스룹바벨 성전은 성전으로 불렸습니다. 그 까닭은 여전한 성전예배와 제사장 보존이 명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전 5세기경 종교개혁을 주도한 에스라(Ezra)를 보십시오. 그는 제사장 순혈주의를 제일 원칙으로 삼았습니다(에 10장 참조). 그 이유는 제사장과 메시야 사상이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대인은 언제부터인가 회당예배에 더 익숙해졌습니다. 아무래도 성전예배와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회당예배를 주도했던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미 학파를 형성하며 왕성하게 성경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주전 1세기경 모든 유대인에게 무상 의무교육이 실행됩니다. 그렇게 유소년기 아동들을 위한 율법 훈련이 체계화됩니다. 회당예배는 이처럼 성경을 대중화하는 데 커다란 보탬이 되었습니다. 마가 역시 어린 시절 회당에서 성경을 배우고 예배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니 마가가 만난 첫 번째 성경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율법일 테고, 창세기부터 훈련받지 않았겠습니까?
창세기와 특히 에덴동산 이야기는 그저 동화가 아닙니다. 수도 없이 에덴동산 설화를 들으며 마가는 무엇을 가슴에 새겼겠습니까? 초대교회와 마가는 어떤 관계입니까? 초대교회 형성사에서 마가 역할은 얼마나 됩니까? 아쉽게도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마가는 어떻습니까? 사도행전 저자는 마가복음에 의존해서 누가복음을 기록했음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을 보면 아예 마가를 모르는 듯 기술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전도 대열에서 이탈한 철부지 마가처럼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보듯 신학적 무게는 묵직하기만 합니다. 마가가 정교하게 구성한 교회 원리들을 보십시오. 왜 하필이면 네 개 원리로 교회다운 교회를 제시했습니까? 이는 마가가 어려서부터 배운 학습 효과에 기인한다고 보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創設)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 2:8)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created). 그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을 위하여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planted). 창조와 창설, 그 미묘한 차이점을 마가는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일하셨음을 배웠습니다. 마가는 에덴동산이 최초의 가정이며 교회임을 배웠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교회는 세상 교회들과 어떻게 다릅니까? 그 결정적 차이점이 무죄 상태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 교회 본연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마가는 에덴동산에서 교회가 추구할 모형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를 현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목표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에덴동산 그 이상이 마가가 바라본 교회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회복은 단순한 원상복구가 아닙니다. 그보다 다시는 죄가 없는 완전한 회복, 곧 거룩한 성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루신 교회는 "영원한 현재"(eternal now)가 됩니다.
마가는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흘러가는 강들에 주목합니다. 성경은 물이 생명과 연관되었음을 자주 보여줍니다. 가장 아름다운 예언이 선지자 에스겔 환상 아니겠습니까(겔 47-48장)? 요한은 그 장면을 새 예루살렘으로 이어갑니다(계 22:1-5). 예수님 또한 그 의미가 내포된 "생수의 강"을 말씀하셨습니다(요 7:38). 그러니 에덴동산에서 흘러가는 네 개 강들을 보십시오. 그 강들과 마가가 제시한 교회 원리를 서로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묘한 일치가 보입니다. 아울러 마태를 왜 레위(막 2:14)라고 소개했는가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동산에서 흘러가는 첫 번째 강은 비손(Pishon)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다는 의미가 비손입니다. 두 번째 강은 기혼(Gihon)이며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강은 힛데겔(Hiddekel ; KJV)이며 티그리스(Tigris ; NIV)라고도 합니다. 아울러 힛데겔은 열매라는 의미입니다. 네 번째 강은 유브라데(Euphrates)이고 하나님의 권능이란 뜻입니다. 자, 그러니 이 강들과 그 의미를 잘 모아보십시오. 그 강들은 에덴동산교회가 지닌 정체성을 세상 밖으로 드러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어떻게 말해도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에 기초합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 중 가장 크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구원을 은혜, 곧 하나님 선물이라 했습니다(엡 2:8). 그런데 그 은혜가 찔끔찔끔 주어진다면 어떻습니까? 구원이 어떻게 감질나게 주어집니까? 구원의 은혜는 말 그대로 풍성하게 주시지 않습니까? 그 넘치는 은혜를 풍성하게 누림이 교회 아니겠습니까? 잔치한마당에 빠질 수 없는 게 먹거리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 강 이름이 열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랑이신 예수님과 이 얼마나 절묘하게 이어집니까?
하지만 교회가 교회인 까닭은 거룩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에덴동산교회 역시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권능이란 말뜻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 역시 거룩함과 직결되지 않습니까?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오직 하나님 주권만 오롯이 드러남이 교회입니다. 마가가 제시한 교회 원리 네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용서와 치유와 기쁨, 그리고 거룩함을 놓치지 마십시오.
에덴동산교회를 적시고 흘러가는 강들에 담긴 의미를 보십시오. 거저 주심과 풍성함과 열매와 하나님 권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특히 마지막 내용에 담긴 원리가 무엇인지를 놓치지 마십시오. 에덴동산교회는 그 하나님의 권능을 놓쳤기에 무너졌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솔직히 세속화는 거룩함이 무너진 결과 아닙니까? 세상을 닮아가는 게 어떻게 거룩함입니까? 에클레시아, 곧 교회란 밖으로 불러낸, 그래서 거룩한 공회입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은 우리를 밖으로 불러냈습니까? 거룩함을 빼놓고 말하니 설명 아닌 궁색한 변명이 됩니다. 거룩함만이 교회인가를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임을 잊지 마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