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에 좋은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
사사기 14장은 삼손의 결혼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속에는 욕망과 선택,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힘의 위험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사명보다 자신의 눈과 감정이었습니다. 이 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선택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힘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가?”
삼손은 딤나에서 블레셋 여인을 보고 부모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부모는 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아내를 구하지 않고 블레셋 사람에게서 아내를 얻으려 하느냐고 만류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삼손의 선택 기준입니다. 개역개정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라는 표현에는 문자적으로 ‘내 눈에 옳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사기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적 문장,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구별하셨는가보다 자기 눈에 무엇이 좋아 보이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선택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가?”보다 “내 마음에 드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판단의 최종 기준을 자신의 욕망에 둘 때 시작됩니다.
그러나 4절은 뜻밖의 말씀을 전합니다. 삼손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칠 기회를 찾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삼손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셨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충분히 이해하고 순종하여 행동한 인물이라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행동 속에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
여기에 섭리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잘못을 사용하신다는 것과 인간의 잘못이 옳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결과가 좋았다는 이유로 잘못된 과정을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섭리를 구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보다 크시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욕망과 폭력이 하나님의 뜻으로 자동 변환되는 것은 아닙니다.
딤나로 내려가던 삼손 앞에 젊은 사자가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자 그는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사자를 찢습니다. 엄청난 힘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14장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삼손은 사자를 이길 만큼 강했지만 자신을 다스릴 만큼 강하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강함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이기는 능력이 아닙니다. 힘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사용하지 않아야 할 때 멈출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이 많을 수 있고, 직책이 높을 수 있으며, 영향력이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숙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말로 다른 사람을 이기면서 분노를 이기지 못할 수 있고, 큰 조직을 운영하면서 자기 욕망 하나를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인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얼마 후 삼손은 죽은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꿀을 떠서 먹고 부모에게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자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습니다.
태에서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된 삼손의 삶에서 이 장면은 중요한 경고를 던집니다. 그는 점점 경계선 가까이로 갑니다. 문제는 신앙의 붕괴가 언제나 거대한 배신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이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타협이 반복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보다 자신의 욕구가 앞서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달콤한 꿀’이 있습니다. 당장은 이익이 되고 즐겁지만 영혼의 방향을 흐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달콤한가가 아니라 그 달콤함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입니다.
결혼 잔치에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자신만 알고 있는 사자와 꿀의 경험을 문제로 내고 내기를 겁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답을 찾지 못하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합니다. 결국 그녀는 울며 삼손을 압박하고 답을 알아낸 뒤 사람들에게 알려 줍니다.
잔치는 즐거움으로 시작했지만 협박과 배신, 분노로 변합니다.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용합니다. 삼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힘과 경험을 상대를 압도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우리의 관계도 경쟁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누가 옳은지, 누가 더 강한지, 누가 이기는지를 증명하려다 사람을 잃습니다.
신앙은 상대를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힘을 배우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수수께끼의 답을 빼앗긴 삼손은 분노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자 그는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서른 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가져다가 수수께끼를 푼 사람들에게 줍니다. 이후 그는 분노한 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그의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에는 불편한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힘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삼손에게 주어진 힘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는 공적 사명과 개인적 감정이 뒤엉키기 시작합니다. 상처받은 자존심과 분노가 그의 행동을 움직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수 있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복수하고, 진리를 말하면서 상대를 모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행동하기 전에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를 움직이는 것은 사명인가, 상처받은 자존심인가?”
사사기 14장은 영웅 삼손의 화려한 승리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큰 힘을 받았지만 그 힘을 다스리는 데 실패하기 시작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손의 가장 큰 적은 사자가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가 싸워야 할 가장 어려운 상대는 자기 안의 욕망과 분노였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바꾸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내가 주장하는 정의 속에 개인적 분노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사사기 14장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지금 자기 눈에 좋은 것을 따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찾고 있는가?”
신앙의 성숙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힘을 다스리고, 욕망보다 말씀을 선택하며, 이기는 힘보다 살리는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