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칼럼: 문장 사이를 걷는 사람들] 소리 내 우는 법을 잊은 나에게

                                                                                                                                 이 성빈 작가



"<에디터의 말>

 

좋은 책과 좋은 문장을 읽으면그 뒤에 숨은 작가의 얼굴이 궁금해집니다그 문장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그날의 마음과 풍경은 어땠는지휴먼컬처아리랑 문학 칼럼문장 사이를 걷는 사람들은 반년마다 한 번소설가·시인·인문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작품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솔직한 뒷이야기부터글을 쓰게 만드는 삶의 순간들까지우리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그 속에 깃든 숨결과 온도를 발견하려 합니다이 여정은 한 편의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 남을 대화가 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해되지 않는 과거를 곱씹는다.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이다. 머뭇거리며 생각하다 보면, 그 시절은 현재로 스며들고 나는 그것을 다시 겪는다. 너무 슬펐다가, 너무 무서웠다가, 막막해졌다가, 지쳐서 이불 속으로 숨을 때가 많다.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 산마르코를 떠올린 시인을 생각하기도 하고, 책과 신문 기사를 곱씹기도 한다. 음악을 들으며 가사를 해석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에서 오래 머문다. 계획 없이 불현듯 찾아오는 기억들이 있다. 마치 어떤 과거에 계속 살고 있는 내가, 현재의 나를 되찾으려 애쓰는 일 같다. 어둠 속에서 총구를 가만히 흔드는 사냥꾼처럼, 더 조용해지고 싶어 숨을 참는 일.

 

사실 그렇게 쓴 잿더미 같은 문장들은 대부분 지워진다. 한 문장, 한 단어만 남기기도 하고, 전부 삭제하기도 한다. 나는 이 과정을 고통의 확장이라 부르곤 한다.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고 오래 가는 관계만 남았다. 개인적으로도 너무 많은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는 편이다. 나는 데일카네기가 아니라서 많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친구를 사귀지 않는 건 너무 폐쇄적인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사람이 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잊으면 실망한다. 예컨대 전에 번데기가 싫다고 말했는데, 술자리에서 번데기탕이 나오면 속으로 참 슬프다. 그래서 나도 상대의 취향, 가치관, 습관, 삶에 영향을 준 책이나 인물까지 기억하려 애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카카오톡 선물하기 기능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인의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카카오톡 선물하기기능으로 축하를 대신하지만, 나는 직접 만나서, 직접 고른 선물을, 직접 전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축하를 보내는 것도, 파티에 초대하지 않은 사람에게 축하를 기대하는 것도 어색하다. 새해 인사 정도는 카카오톡으로 보낼 수 있지만, 중요한 기념일을 축하할 때는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선물을 고를 때, 나는 상대를 떠올린다. 무엇을 좋아할지, 무엇이 필요할지, 어떤 순간에 기뻐할지를 고민한다. 단순히 기프티콘 하나 보내고 끝과는 결이 다르다. 요즘 세상은 너무 간단하게 축하를 주고받는 것 같다. 누가 내 생일을 챙겨줬는지를 계산하고 비교하는 풍토가 자연스레 자리 잡았는데, 난 그게 너무 비겁하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이런 세태를 바라보면서, 나만의 방식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기념일만 챙기고, 시간을 내어 직접 만나 축하를 전하는 것. 혹은 기념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만 참여하는 것.

단순히 취향을 넘어서서 여전히 이 세상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와 세심함이 존재한다고 믿는 내 생각의 방식이다. 작은 손길과 직접적인 만남에서만 전할 수 있는 진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믿는다.

 

누군가 나를 소개해 달라면 마음속으로 생각이라는 단어를 천 번쯤 적을 것이다. 잠결에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잠이 많은 편이라 여덟 시간은 기본이고, 실제로 일정이 없으면 하루종일 이불 속에 있기도 한다. 생각이 많아 에너지가 쉽게 소모된다.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살이 잘 찌지 않는 이유다. 게임도 좋아하지만 피곤해서 특별하게 안 하고는 못 배길 정도가 아니면 안 한다. 스무 한 살 무렵부터는 2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서 매일 수면제를 먹고 잤지만, 상담과 생각을 안 하는 훈련과 노력 끝에 이제는 약 없이도 잔다. 요즘은 오히려 잠이 너무 많아 문제일 때가 있다.

 

나는 말을 잘 못한다. 머릿속 생각이 너무 많아 준비되지 않은 대화는 어렵다. 남을 과하게 의식하고, 내 말이 누군가를 상하게 하진 않을까 늘 눈치를 본다. 하나 모순이 있다면, 그래도 줏대가 있는 편이라 무례한 사람에게는 어떤 행동이 지금 내 감정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거침없이 말한다. 그 와중에도 내 몸에는 방어적인 태도가 배어 있다. 예를 들면 평범한 공대생인 나에게 이런 인터뷰 제안은 영광이지만, 동시에 두렵다. 에디터님의 제안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응하면 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쓸데없어 보일지 모를 걱정들은 여전히 따라온다. 그 걱정 속에서 문장을 검열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물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외부의 시선을 내려놓고, 비밀 일기를 쓰듯 오직 나의 목소리로 적으라는 부탁을 받았다.

 

많은 이야기는 어쩌면 할 말 없음의 위장일 수 있다. 그래도 적은 이야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보다 다시 만나고 싶은 많은 얼굴들을 잊지 않았다.

 

종종 생각한다.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 끝없는 내적 파열만이 이곳에 남아, 나는 여전히 문장 사이를 걷고 있다.

작성 2025.08.14 10:18 수정 2025.08.1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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