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마저 부덕의 소치였던 조상님들


 

바다는 위치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높은 곳에 흘러드는 물이 깨끗한 물이든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바다는 흘러 들어오는 물을 거부할 권한이 없다. 백성은 바다와 같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백성은 바다처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 AI image. antnews 제공>


국민의 4대 의무인 조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부터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백성들은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할 사항이 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수량적으로 가장 많이, 가장 넓게 포진하고 있는 가장 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집채같은 폭풍과 풍랑을 이길 군주도 왕도 없기 때문이다.

 

백성 또한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수량적으로 가장 많고 힘있는 바닷물처럼 언제든 폭동과 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힘있는 자들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벌떼 같은 백성들의 민란을 이기고 살아남은 군주는 한 명도 없다. 스밀 곳만 있으면 스며드는 유연함과 어떤 맹렬한 화마(火魔)도 결국 무릎을 꿇게 하는 물처럼 어떤 강압적인 명령과 지시도 국민을 이기지 못한다. 예부터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요, 군주의 하늘이다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농업을 경제 기반으로 했던 조선에서 흉년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였다. 지하수 개발이나 관개(灌漑)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시대에 농사는 사람이 아닌 하늘에 달려있는 일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늘에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지내는 게 전부였다. 실제로 조선의 23대 왕인 순조(純祖) 때 가뭄이 계속되어 농사를 망칠 위기에 처하자 순조는 우선 신하들을 보내 한강과 남단(南壇)과 삼각산 세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각 지방관들에게는 그 지역에 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기우제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서 비를 부르는 기우제를 지내느라 바빴다.

 

다행히 기우제가 효험을 본 곳도 있었다. 기우제 이후 조금씩 비가 내렸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가 내린 지역이었다. 아직 보리를 수확해야 하는 평안도과 황해도에는 많은 비가 내려 냇가가 넘쳐 포()가 잠기기도 하고, 비 때문에 보리 수확을 망치기도 했다. 황해도에도 측우기 수심으로 35(100mm)의 비가 내렸다. 그만한 양이 당장 모내기를 해야 하는 호남이나 영남 지방에 내렸다면 조정의 근심을 덜고도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비가 필요한 호남과 영남 지역은 여전히 맑은 하늘이었다.

 

그래서 결국 왕이 나섰다. 순조(純祖)는 자신이 직접 남단(南壇: 조선시대 때, 오방토룡제(五方土龍祭)를 지내던 제단(祭壇) 중의 하나)에 나아가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중신들을 보내는 정도의 정성으로는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면서도 행여 자신의 행차가 백성들의 생업에 영향을 주어 그것이 천기를 거스를까 싶어, 길을 닦거나 시전(巿典)에 있는 임시가옥 철거를 금했다.

 

순조는 음력 610, 묘시(오전 5~7)에 궁을 나가 숭례문을 거쳐 남단에 이르러 목욕재계(沐浴齋戒)한 후 기우제를 지냈다. 왕의 치성(致誠)이 하늘에 닿았을까? 해가 지고 초경(오후 7~9)에 이르자 구름이 하늘에 가득 찼고, 4(오전 1~3) 무렵에는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동행했던 백관들의 관복을 모두 적실 만큼 내렸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현상은 사람이 쉽게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불볕더위든 폭우든 사전에 대비를 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따라서 비가 오지 않거나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이를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책임이나 부덕의 소치로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런 자연재해, 즉 천재(天災)마저 자기의 책임이나 부덕의 소치로 여기는 군왕과 지방관들이 많았다. 오늘 현재 최소한 스스로를 정치가나 위정자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면 천재마저 자기 부덕의 소치로 여겼던 옛 조상님들의 마음가짐을 한 번쯤 되새겨 보길 바란다.

 

 

-손 영일 컬럼 



작성 2026.02.12 09:18 수정 2026.02.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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