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 108. 사쓰마 번은 왜 자나 리잔(謝名利山) 을 ‘전범’으로 만들었나

반간지서(反間之書)는 왜 동료의 손에 의해 사라져야 했는가

기쇼몬(起請文)이 강요한 류큐(琉球) 멸망 인정의 구조

오키테 15조(掟15条)가 완성한 외교·무역·행정의 전면 통제

사쓰마 번이 류큐(琉球) 침공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작업이었다. 침략의 정당성을 만들고 전후 질서를 유리하게 재편하려면, 모든 파국의 원인을 대신 짊어질 표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놓인 인물이 바로 자나 오야카타, 곧 자나 리잔(謝名利山)이었다. 그는 사쓰마의 일방적인 복속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대일 강경 노선을 이끈 인물로 지목되었고, 사쓰마는 국왕 쇼 네이(尚寧)와 다른 관료들의 책임은 축소하는 대신 자나 리잔 한 사람을 전쟁을 일으킨 핵심 인물로 몰아갔다. 

 

이 과정은 단순한 책임 추궁이 아니라, 류큐 침공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덮기 위한 정치적 장치였다.

 

기사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이미지=AI 생성]

 

포로 생활 속에서도 자나 리잔은 국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한 중국 선박 편을 통해 명(明)나라의 구원을 요청하는 밀서를 몰래 보냈다. 이른바 반간지서(反間之書)였다. 그러나 이 절박한 문서는 류큐를 구하는 열쇠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류큐 내부의 다른 관료가 이를 회수하고 파기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1610년, 사쓰마 번은 류큐를 통한 대중국 무역 재개를 위해 포로 가운데 이케구스쿠 안라이(池城安頼)를 먼저 오키나와로 돌려보낸 뒤, 진공사(進貢使)로 삼아 푸저우(福州)로 파견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나 리잔이 보낸 밀서가 이미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쓰마의 군사 통제가 명나라에 드러날 경우, 류큐가 의존하던 조공 무역이 영구히 끊길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이케구스쿠는 공금(公銀)까지 써가며 중국 상인들로부터 그 밀서를 사들여 없애는 선택을 했다. 

 

조국을 구하려던 충신의 문서가, 조국의 생존을 도모하려던 동료 관료의 손에 의해 사라진 것이다. 이 장면은 당시 류큐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비정하고 복합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1611년 사쓰마 번은 억류된 류큐 관료들의 귀국 조건으로 기쇼몬(起請文)을 내밀었다. 자나 리잔이 끝내 서명을 거부하고 참수까지 당한 이유는 이 문서의 내용 자체가 류큐의 역사와 주권을 부정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기쇼몬은 류큐 왕국이 막부와 사쓰마 번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정벌당했다고 규정했다. 

 

침략의 책임을 침략당한 쪽에 떠넘긴 셈이다. 더 나아가 류큐국은 한 차례 멸망했으나 시마즈(島津) 가문의 은정(恩情)으로 아마미 제도(奄美諸島)를 제외한 영토를 다시 하사받았다고 적시했다. 이는 류큐의 존속 자체가 사쓰마의 시혜 덕분이라는 논리를 강요한 것이었다. 

 

여기에 자자손손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시마즈 가문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담겼다. 자나 리잔에게 이 문서는 단순한 귀국 서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국의 멸망을 스스로 인정하고, 영원한 복속을 받아들이라는 강요장이었다.

 

사쓰마 번의 통제는 기쇼몬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키테 15조(掟15条)는 류큐를 법과 제도로 묶어두는 또 하나의 족쇄였다. 여기에는 사쓰마의 허가 없이 중국이나 다른 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되었고, 일본 상인의 류큐 출입까지 통제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국가의 핵심 권한인 외교권과 무역권을 사실상 박탈한 조치였다. 내정 영역에서도 제약은 광범위했다. 현재 관직이 없는 자나 여성에게 영지(知行)를 주는 일을 금했고, 백성을 노비로 삼아 매매하거나 일본으로 넘기는 행위 역시 금지했다. 

 

경제 질서 역시 사쓰마의 틀 안에 편입되었다. 도량형은 일본의 마스(桝)의 사용이 강제되었고, 조세인 연공(年貢)도 사쓰마 봉행(奉行)의 기준에 따라 바쳐야 했다. 류큐의 경제와 행정 체계는 이로써 외형만 남긴 채 구조적으로 종속되기 시작했다.

 

결국 국왕 쇼 네이와 삼사관(三司官) 등은 백성의 생존과 왕국의 껍데기라도 지키기 위해 굴욕적인 문서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나 리잔은 끝내 무릎 꿇지 않았다. 귀국 하루 전날, 그는 이역만리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반간지서는 동료의 판단에 따라 세상 밖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거부와 죽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자나 리잔의 최후는 류큐가 이후 짊어져야 했던 이중 지배의 시작이 어떤 폭력과 굴욕 위에서 세워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자나 리잔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류큐 왕국이 침략 이후 어떤 방식으로 굴복을 강요받았는지, 그리고 그 굴욕 속에서도 끝까지 서명을 거부한 저항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언이다.

 

사쓰마 번은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침공의 책임을 뒤집어씌웠고, 반간지서는 생존을 위한 현실 논리 속에서 사라졌으며, 기쇼몬과 오키테 15조는 류큐의 외교·무역·행정 질서를 뿌리째 통제했다. 결국 자나 리잔의 최후는 근세 류큐의 이중 지배가 시작된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남는다.

작성 2026.03.31 08:54 수정 2026.03.3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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