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韓非子)를 읽다 보면 활쏘기에 관한 흥미로운 비유 하나가 나온다. 정해진 과녁 없이 아무렇게나 화살을 쏘아 우연히 가는 털 하나를 맞혔다고 하여 명사수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정한 과녁을 세우고 반복하여 맞히는 자야말로 진정한 명궁(名弓)이다. 한비자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명확하다. 군주가 사람을 쓰고 정책을 판단할 때 명확한 기준, 즉 법도(法度)가 없으면 결국 화려한 말솜씨를 가진 아첨꾼과 변설가에게 속아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는 준엄한 경고다.
늘 말하지만, 오늘날 한비자가 말한 ‘군주’는 왕궁의 임금이 아니다. 민주주의 시대의 군주는 곧 주권자인 국민이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우리를 대신할 대리인을 직접 뽑는다. 그러므로 옛 군주가 참모를 선발할 때 엄격한 원칙을 세웠던 것처럼, 오늘의 국민 역시 대리자를 선택할 때 눈이 번쩍이는 분명한 과녁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우리의 정치가 종종 그 과녁을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최근 선거를 둘러싼 여러 평가 중 하나는 ‘원칙 없는 선거 전략과 메시지의 혼선’이다. 지지층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중도층으로 메시지를 급선회하고, 지역 민생과 직결된 현안보다 중앙정치의 거친 정쟁 프레임에 지나치게 기대며, 인물 경쟁력보다 정당 바람에만 의존했다는 비판이 매섭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해석을 넘어,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민낯이다. 한비자의 말을 빌려 본질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에게는 그들을 꿰뚫을 확고한 과녁이 있었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했는가. 순간의 분노였는가, 진영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이었는가, 아니면 자극적인 유튜브 영상과 번지르르한 말 몇 마디였는가. 한비자가 말한 법도란 권력을 맡길 사람을 평가하는 최소한의 검증이자 엄격한 기준이다.
대리자를 뽑는 가장 확실한 과녁은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어야 한다. 식민지 시대와 독재 시대에 권력의 개가 되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진 않았는지, 부정으로 재산을 축적하거나 법의 이름으로 무고한 이를 가두고 고문하는 데 동조하진 않았는지, 공동체보다 사익을 앞세우진 않았는지 낱낱이 따져야 한다. 사람은 말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삶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원칙 없이 뽑힌 권력은 결국 국민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 증오와 분열이 자라나 국론은 쪼개지고, 청산되지 못한 기득권 잔존 세력들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힘을 과시하며 주권자를 조롱한다.
한비자는 기준이 없는 군주는 결국 변설가에게 오래도록 기만당한다고 했다. 정치가 이토록 혼란스러운 이유는 쓸 만한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과녁도 없이 맹목적인 화살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과녁을 세우느냐에 따라 대리자들의 화살 방향이 바뀐다. 기만당하는 나약한 군주로 남을 것인가, 엄격한 법도로 조정을 호령하는 현명한 군주가 될 것인가. 선택은 오롯이 주권자인 우리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