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역사박물관 금가현 관장 ‘휴전선 아래 피어난 기억의 숲, 그리고 노란 조끼의 천사’

-5대째 이어온 고향의 무게, 화려한 성공 뒤로하고 ‘기록의 최전선’에 서다

-지게부대의 땀방울과 군마 레클리스의 질주... 그날의 기억을 내일의 유산으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돌아보는 우리의 평화는 누군가의 비범한 희생 위에 피어난 결실이다.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킨 이들의 헌신은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고, 그 황무지 같던 전장은 이제 역사의 마중물이 되었다. 그 분단의 최전선인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에서 사라져가는 기억을 수집하고 이웃을 돌보는 이가 있다. 백학역사박물관 금가현 관장의 이야기다.


◇화려한 성공을 뒤로하고, 지게를 지셨던 아버지의 등으로 돌아오다

도시에서 승강기 제조 및 관련 부품 사업 분야의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며 남부럽지 않은 경제적 성공과 안정된 삶을 구가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도시에서의 삶이 풍요로워질수록 그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본연의 갈증은 깊어만 갔다. 그의 깊은 뿌리가 내린 곳이자, 무려 5대째 조상들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의 바람과 흙내음이 문득문득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2010년, 금가현 관장은 미련 없이 도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고향으로의 귀향을 선택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2013년 우연히 참여하게 된 ‘DMZ 주민아카데미’는 인생의 방향타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매일같이 무심히 지나치던 고향의 산천과 들판이, 사실은 민족사의 거대한 상흔이 묻힌 무덤이자 눈물겨운 호국영웅들의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깨단한 것이다.


백학면은 역사적으로 1919년 연천 지역 최초로 3·1 만세운동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항일의 고장이다. 동시에 6·25전쟁 당시에는 단 한 치의 땅도 적에게 양보할 수 없었던 유서 깊은 격전지였으며, 휴전 이후에는 마을 정중앙을 군사분계선이 관통하며 남과 북으로 강제로 갈라지게 된 분단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내 아버지가, 그리고 내 이웃집의 할아버지가 바로 역사가 기억해야 할 진짜 영웅들이었다. 전쟁 당시 제대로 된 군복조차 입지 못한 채, 총 대신 나무 지게를 진 채로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고지를 맨몸으로 오르내리던 민간인 노무자, 바로 ‘지게부대’원들이었다. 국가의 공식 역사에서는 희미하게 잊혔을지 몰라도, 그 피를 이어받은 우리마저 이 기억을 묻어버린다면 그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무서운 책임감이 가슴을 쳤다”


그날 이후 금 관장은 사비를 털어 마을의 사라져가는 파편들을 수집하는 ‘기록의 파수꾼’을 자처했다. 주민들의 장롱 속에 깊숙이 잠들어 있던 참전유공자들의 빛바랜 사진을 어렵게 발굴해 내고, 농부들이 밭을 갈다 발견한 녹슨 철모와 탄피, 포탄 껍데기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홀로 발로 뛰며 고향의 기억을 모은 지 수년, 백학면 주민자치위원회와 힘을 합쳐 적극적으로 공모사업을 유치해 냈고, 2년간의 치열한 준비 과정을 거쳐 마침내 2018년 ‘백학역사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포탄 나르던 군마(馬) ‘레클리스’와 지게부대... 잊힌 영웅들을 위한 헌사

백학역사박물관은 국가가 운영하는 여타 대형 안보 전시관처럼 거대하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대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이고 눈물겨운 생활사 중심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박물관 내부에는 백학의 격동적인 100년 역사가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그려진 벽화로 채워져 있으며, 실제 참전유공자들의 주름진 얼굴 사진, 구멍 난 철모, 빛바랜 총기류와 탄알, 그리고 당시의 모형 땅굴 등이 알차게 짜여 있다.


특히 금 관장이 가장 깊은 애정을 쏟는 전시물은 미 해병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을 누비며 미 정규군 하사 계급까지 부여받았던 전설적인 군마 ‘레클리스(한국명 아침해)’에 관한 기록이다. 책 속의 신화가 아니라, 바로 이 백학면 연천리 전장의 자욱한 화염 속을 피투성이가 된 채 달리던 눈물겨운 존재다. 포탄이 터지는 공포 속에서도 인간과의 신뢰를 지키며 묵묵히 고지로 탄약을 나르던 레클리스의 숭고한 서사는, 금 관장이 2019년 설립한 ‘아침해협동조합’의 모태이자 상징이 되었다.


“박물관을 찾는 수많은 관람객들이 가장 오랜 시간 발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훔치는 곳은 세련되게 꾸며진 디지털 영상 앞이 아니다. 녹슬고 구멍 난 작은 철모 하나, 그리고 이름 없는 참전유공자들의 주름진 얼굴 사진 앞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용맹한 사람들의 후예’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던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과 비범한 희생을 감내했던 우리네 이웃들이다. 나는 그들의 묻힌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작은 마이크일 뿐이다”


금 관장은 단지 유물을 전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직접 ‘마을해설사’로 길러냈다. 교과서 속 역사학자의 매끄러운 정제된 언어가 아닌, 그 모진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고 버텨낸 주민들의 투박하고 진정성 어린 목소리로 전달되는 백학의 이야기는, 이곳을 찾는 수많은 방문객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선사하는 대체 불가능한 역사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노란 조끼를 입은 천사, 역사의 기억은 이웃 사랑으로 완성된다

호국선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금 관장의 발걸음은 지나간 과거에만 멈춰 서지 않는다. 그 숭고한 희생정신의 본질은 결국 오늘날 우리 이웃을 향한 사랑과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바쁜 박물관 운영 속에서도 12년간 대한적십자사 봉사회와 뜻을 같이하며, 연천백학봉사회장을 거쳐 현재 연천군협의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지역 취약계층의 손을 잡아가고 있다.


금 관장은 한파와 폭염 속에서 소외된 이웃을 돌보느라 지쳐가는 동료 봉사자들을 위해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한적십자사봉사회 연천군협의회 사무실’의 개소를 든든하게 이끌어냈다. 이곳은 단순히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사무 공간을 넘어,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들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소통하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 공간을 구심점 삼아 무료 급식 봉사, 긴급 재난구조 활동, 취약계층 생필품 전달 등 연천군 전역의 어두운 구석을 따뜻하게 밝히는 ‘노란 조끼의 행진’이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다.


“흔히 봉사라 하면 내가 가진 여유로 남을 돕는 일방적인 활동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참뜻을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다. 직접 현장에서 땀을 흘려보면 알게 된다. 도움을 받는 수혜자보다,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주는 봉사자가 수백 배는 더 큰 행복과 위로를 얻어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노란 조끼를 입고 땀방울을 흘리는 그 순간이야말로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장 순수한 시간이다. 이 험난한 길에 묵묵히 버팀목이 되어 함께 걸어주는 마을 주민들과 동료 봉사자들이 있기에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역사를 바르게 알고 전하는 것, 과거의 불행을 막는 유일한 열쇠

백학마을이 지난 2015년 전국 1호 ‘호국영웅 정신계승 마을’로 지정되고, 오늘날 명실상부한 ‘DMZ 역사문화마을’로 반석 위에 오르기까지 금 관장은 쉼 없이 현장을 누비며 종횡무진해 왔다.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정작 본인은 “그저 고향의 주민으로서,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했을 뿐”이라며 자신을 낮춘다.


그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와 다음 세대를 향한 간절한 당부의 말을 남겼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처럼, 과거의 아프고 불행했던 분단과 전쟁의 역사가 이 땅에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유일한 열쇠는 결국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이라는 확신이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다음 세대를 짊어질 아이들이 백학역사박물관의 문을 열고 들어와 갈등이나 대립이 아닌, 평화와 안보, 그리고 이름 없는 영웅들의 헌신 가치를 가슴 깊이 새기고 돌아갈 수 있도록 내 남은 생을 온전히 바칠 생각이다”


초여름의 푸르른 녹음이 짙어가는 휴전선 아래 접경마을 연천군 백학면. 그곳에는 잊혀가는 역사를 온몸으로 붙잡아 보존하는 위대한 파수꾼이자,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노란 조끼의 천사, 금가현 관장이 오늘도 묵묵히 자신만의 ‘기억의 숲’을 울창하게 가꾸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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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6.10 15:12 수정 2026.06.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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