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연 마가는 누구에게 그가 기록한 복음서를 보냈습니까? 소위 처음 독자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과정은 매우 힘겹습니다. 하지만 대상도 없는데 문서를 기록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니 마가복음을 처음 읽고 접한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이를 학자들은 마가공동체 혹은 마가교회라 부릅니다. 마가공동체는 어떤 신앙 색깔을 가졌습니까? 그 신앙 노선과 수준을 고려한 문서가 곧 마가복음 아니겠습니까? 왜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과 다릅니까? 물론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만 독특한 내용 역시 많지 않습니까? 그 특수성을 찾아내며 각기 고유한 공동체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마태공동체, 누가공동체, 요한공동체 색채가 드러납니다. 그러면 마가공동체는 어떤 색깔을 가졌습니까? 마가복음이 간직한 신학 과제를 추적해 보십시오. 그렇게 찾아낸 과제를 흔히 마가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잘 아는 대로 마가복음은 네 권 복음서 중 가장 짧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이들은 마가복음을 요약본으로 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압축해 놓은 복음서로 접근합니다. 그래선지 복음서 연구 중 마가복음 연구가 가장 늦었습니다. 그나마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연구를 뒷받침하는 보조기능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가장 주목받는 복음서 연구는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문체상 특징은 간결하고 직설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마가복음 특징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대표되는 문장이 첫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마가는 앞으로 이야기할 주제를 이 한 구절로 압축했습니다. 그 어떤 저자보다 복음, 그 의미를 가장 신선하게 전하려고 합니다. 그가 강조한 복음, 그 중심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입니다. 마가에게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복음은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이 하나로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보탤 수도 뺄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자니 바울서신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사실 신약성경에서 교회란 단어는 바울서신에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또한 복음서에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교회란 단어가 있습니다(마 16:18). 그러니 교회를 말하자면 바울서신이 우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교회란 단어가 없는데 교회론을 말하기가 쉽겠습니까? 그나마 마태복음은 비록 달랑 한 번이지만 교회가 나옵니다. 반면 다른 복음서에는 아예 교회란 단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태복음 교회론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교회론이나 요한복음 교회론 역시 가능합니다. 그러니 마가복음 교회론 역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란 단어가 없음에도 교회론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 교회론 중추랄 수 있는 바울서신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성도가 유기적으로 연합함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 유기적 연합을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낸 단어가 무엇입니까? 바울 교회론은 "그리스도 안에", 곧 "엔 크리스토"가 전부입니다.
비록 교회란 단어는 없지만 마가가 전하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마가는 누구보다 바울이 말한 "엔 크리스토"란 단어에 민감합니다. 그렇게 마가가 전하는 교회는 어떠한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어쩌면 갈릴리에 존재했을 마가교회가 추구한 이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가교회는 마가가 강조한 교회를 드러내려고 애썼다고 봅니다. 그래서 과연 마가공동체가 추구한 교회는 어떠한지 추적해 봅니다.
마가는 누구보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왜냐면 에덴동산이야말로 교회 원형일 수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창 2:8). 그렇게 에덴동산에 교회이자 가정인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큰 가정이며 가정은 작은 교회란 말이 맞습니다. 교회와 가정은 무엇보다 사랑이란 원리로 움직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이라고 하면 얼핏 사람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중심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신약 교회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유기적 연합체라 했습니다. 성도는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누가 우선이라 생각되십니까? 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자꾸만 보이는 성도에게 쏠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누가 뭐래도 예수님이 중심이며 전부여야 교회 아닙니까? 웬만큼 성경을 읽지 않으면 마가가 그려준 교회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막연하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바울 언어인 "엔 크리스토"를 기억하면 쉽게 찾을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소개된 사건을 잘 보십시오. 마가는 창세기 2장과 겹치도록 교회론을 재구성했습니다.
동산에서 발원하여 흘러가는 네 개의 강을 기억하십시오. 왜 그 강들 이름이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인지 물어보십시오. 아쉽게도 우리는 그 강들 이름이 내포된 교회 의미를 놓쳤습니다. 그러니 지금에라도 왜라고 다시 질문해 보십시오. 그렇게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네 개의 "어찌하여"를 보십시오. "어찌하여"가 사실은 "왜"(why) 아닙니까? 네 사건과 그 속에 나오는 질문을 둘러싼 예수님 모습, 곧 정체성(identity)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고치시며 말씀합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그러자 서기관들이 예수님 말씀이 신성모독이라며 반발합니다. 하지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속으로만 웅얼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마음을 읽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첫 번째 사건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밝힙니다. 다시 말해 교회 중심에 계신 예수님은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무엇보다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용서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해야 맞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 이름으로 죄를 사하는 권세가 드러납니까? 용서는 언제나 사랑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곧 용서하라는 말씀 아닙니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함이 용서로 이어지는 사랑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교회는 그 용서의 원리가 살아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