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교회란 단어가 한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주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닙니까? 교회는 시작부터 주님께 속한 공동체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베드로 복음서라면서 이 내용이 없습니다. 만일 베드로와 마가가 영적인 부자 관계라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교회론을 세워줄 중요한 내용인데 아예 생략했습니다. 이는 마태와 마가가 바라본 이상적 교회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사도가 중심이 된 교회를 추구합니다. 그렇게 베드로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교회론을 구성합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어떤 신앙고백을 했는가를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6-19)
위 내용을 마가복음에 있는 평행본문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생략되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를 통해 베드로와 마가 관계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마가가 의도적으로 교회론 핵심 내용을 간과한 셈입니다. 마태복음은 교회론 핵심을 예수님이 누구신가, 곧 정체성(Identity)으로 봅니다. 결과론이지만 마태복음은 교회를 직설어법으로 풀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라 말씀하셨으니 다른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반면 마가복음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풀어 설명합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과 그의 몸 된 성도가 하나로 연합함이 교회입니다. 마가는 교회란 말 대신에 복음을 앞세워 예수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곧 교회임을 암시합니다.
마가가 그리는 이상적인 교회 모델은 예루살렘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가는 예루살렘 교회는 무엇인가를 놓쳤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교회가 무엇을 놓쳤는지 주목하십시오. 주님 약속을 놓쳤다면 어떻습니까? 그 약속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회가 어떻게 교회일 수 있습니까? 마가가 날린 직격탄은 파괴력이 어마어마합니다. 마가는 예루살렘 교회를 대체한 새로운 교회를 암시합니다. 그 교회가 곧 갈릴리 교회입니다. 그러면 마가가 제시한 이상적 모델인 갈릴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갈릴리 교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고백합니까? 마가복음 2장에 소개된 사건과 그 중심에 계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특히 인자(人子)라 말씀하신 예수님 정체성에 주목하십시오.
지난 글에서 예수님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막 2:10). 따라서 교회는 용서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레위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막 2:13-17). 마가복음은 레위라 하고 마태복음은 마태라 했습니다(마 9:9). 왜 마가는 마태라 말하지 않고 레위라고 했습니까? 마가는 누구보다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에 대해 빠삭합니다.
특히 열두 제자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레위가 아니라 마태라 부름이 당연한데 굳이 레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제자 이름을 보십시오. 레위가 아니라 마태 아닙니까(막 3:18)? 그런데 왜 본문에서는 마태란 이름 대신 레위라고 했습니까? 사실 이 질문이 마가 공동체가 그리는 교회론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창세기 2장이 그려주는 교회와 맞물려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신학의미는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다만 마가가 마태를 레위라 부른 이 장면이 주는 또 다른 암시 하나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레위라 했으니 어쩌면 마태는 몰락한 레위 가문일지도 모릅니다. 성전예배를 도울 길이 막힌 만큼 생존과 생계를 위해 세관에서 일한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세관원들을 창녀들처럼 죄인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 3대 사명으로 예배와 교육과 전도를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장소를 주목하십시오. 무엇을 가르쳐야 교회가 말하는 교육입니까? 또한 어디에서 가르쳐야 교회가 말하는 교육입니까? 설마 성경 아닌 다른 그 무엇도 괜찮다고 하시겠습니까? 한국교회 위기는 말씀 중심에서 이탈한 줄 모르는 영적 불감증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회당이 아닌 그 어디에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설마 예수님께서 회당이 아니라고 하나님 말씀 말고 다른 것을 가르쳤겠습니까?
가르침이 끝나고 지나가시던 중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1그룹에 속하는 제자들 말고는 유일하게 마태를 예수님이 친히 부르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복음서인 마태복음 기록자를 돋보이게 한 셈입니다. 세관원이라면 누구보다 돈 계산이 빠릅니다. 솔직히 재정을 관리하기에 가장 적합한 제자가 마태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마태를 빼놓고 생뚱맞게 도둑놈 가룟 유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왜 마태에게 재정을 맡기지 않았는지도 물어보긴 해야 합니다.
자, 문제는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시자 그는 곧바로 일어났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생존과 연관된 세관원 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님 제자가 됨을 그렇게나 기뻐한 이는 그가 처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잔치를 보면서 누가 불만을 터트립니까? 그들이 어떤 말로 비난을 퍼부어 댑니까? 그들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태가 베푼 잔치에 불만을 쏟아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장면을 봅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지 묻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리와 및 죄인과 교제함이 마땅치 않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콕 집어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정체가 무엇입니까? 병든 자에게 필요한 의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깨끗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병 고치는 의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는 어떤 역사가 나타나야 옳습니까? 병 고치는 역사, 다시 말해 치유의 역사가 있어야 맞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이 말하는 치유는 궁극적으로 영적 치유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신 말씀이 그렇습니다.
의사이신 예수님이 교회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 만큼 교회는 치유 원리에 의해 움직임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그 기능을 내려놨습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 있습니다. 질병 치유 상당 부분은 과학과 연계된 영역에서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영적 치유까지 교회가 내려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으로만 치유가 가능한, 그런 질병이 여전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치유를 무슨 기도원용으로 돌려놓는 불편한 진실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실 교회는 은사를 비판만 하지 않습니까?
은사를 빼버리고 정치 놀음에 빠진 교회가 어디 한둘입니까? 제발 교회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교회가 놓쳤던 중요 과제를 되살려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