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랫줄이 팽팽해지는 날 / 김종일
- 바람이 처음으로 방향을 바꾸던 날 / 여름내 축 늘어져 있던 빨랫줄이 / 저 혼자 팽팽해졌다 / 젖은 것들이 빨리 마르기 시작했다.
풀빛이 무릎에서 발목께로 내려오고 / 내려온 만큼 하늘이 어깨에 와 앉는다 / 견딘다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 숨 하나가 겨우 들어선다.
감나무는 제 열매의 무게만큼 팔을 굽힌다 / 무거워지는 일이 다만 늙는 일은 아니어서 / 휘어진 자리마다 / 붉은 것이 하나씩 앉는다.
떠난 이가 앉던 자리를 저녁이 건너간다 / 나는 마루 끝에 앉아 / 그늘이 담장에 닿을 때까지 /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셈해 보면 잃은 것이 언제나 먼저 오고 / 얻은 것은 늘 뒤늦게 도착한다.
노을이 서쪽 처마를 적시는 동안 / 오늘 떨어진 것들을 나는 쓸지 않는다 / 감잎 한 장이 마당에 엎드려 / 제가 누운 자리를 오래 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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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사람이 무엇을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빨랫줄 하나가 저 혼자 팽팽해졌다고 적는다. 시의 첫 문장에서 이미 이 작품의 전략은 다 드러나 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말도, 마음이 달라졌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여름내 늘어져 있던 줄이 어느 날 스스로 당겨졌다는 사실 하나만 놓아둔다. 그런데 그 한 줄의 물리적 변화가 독자의 명치를 정확하게 누른다.
시를 읽는 사람이라면 안다. 빨랫줄은 계절을 재는 오래된 계기(計器)다. 습도가 내려가고 대기가 마르면 줄은 팽팽해지고, 젖은 것들은 빠르게 마른다. 시인은 이 흔한 물리 현상 하나를 골라,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에 세워 두었다. 관념이 아니라 사물로 시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저 혼자"라는 부사가 결정적이다. 사람의 손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세상의 어떤 회복은 인간의 노력과 무관하게 온다는 조용한 고백이기도 하다.
몸이 곧 계절의 좌표가 되다
둘째 연에서 시인은 계절의 이동을 신체의 좌표로 옮겨 적는다. 풀빛이 무릎에서 발목께로 내려온다. 풀이 시들어 짧아지는 현상을, 자기 몸의 눈금으로 계측한 문장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내려온 만큼 하늘이 어깨에 와 앉는다. 풀이 낮아진 자리를, 높아진 가을 하늘이 정확히 채워 넣는다. 세계는 비는 법이 없고, 무언가가 물러난 자리에는 반드시 다른 것이 들어선다. 이 두 행은 한 편의 물리학이자 한 편의 신학이다.
이어지는 두 행은 이 시 전체에서 가장 절제된 대목이다. "견딘다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 숨 하나가 겨우 들어선다." 견뎠다고 말하는 순간, 견딤은 자랑이 된다. 시인은 그 유혹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래서 그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고 에둘러 말한다. 고통을 통과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아직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견딤을 발설해야만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환희도 보상도 아니고 겨우 숨 하나다. 이 겸손한 크기가 이 시를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든다.
굽는 것이 곧 붉어지는 일 — 감나무의 신학
셋째 연은 이 작품의 사유가 한 단계 도약하는 지점이다. 감나무는 제 열매의 무게만큼 팔을 굽힌다. 나뭇가지를 "팔"이라 부르는 순간 나무는 인격이 되고, 굽힘은 굴욕이 아니라 자세가 된다. 그리고 시인은 곧바로 오해를 차단한다. "무거워지는 일이 다만 늙는 일은 아니어서."
이 한 행에 이 시의 윤리가 응축되어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흔히 상실의 목록으로만 계산된다. 무릎이 상하고, 이름이 잊히고, 자리가 좁아진다. 그러나 시인은 무게의 다른 얼굴을 본다. 가지가 휘는 것은 쇠약해서가 아니라 열매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휘어진 자리마다 붉은 것이 하나씩 앉는다는 마지막 행은, 굽힘과 결실이 같은 사건의 앞뒤임을 말한다. 굽지 않고 익는 열매는 없다.
주목할 것은 시인이 이 통찰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생이 어떻다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감나무 하나를 오래 쳐다본 사람의 관찰만 있고, 해석은 전부 독자에게 넘어온다. 이것이 좋은 서정시가 독자를 대접하는 방식이다.
이 시의 심장 — 회계 장부의 문장
넷째 연에서 시는 처음으로 사람 쪽으로 몸을 돌린다. 떠난 이가 앉던 자리를 저녁이 건너간다. 여기서도 주어는 사람이 아니라 저녁이다. 시인은 그 자리를 바라보지 않고, 저녁이 그 자리를 건너가는 것을 바라본다. 슬픔을 직접 응시하지 않고 슬픔 위를 지나가는 빛의 이동으로 대신한 것인데, 애도를 다루는 가장 성숙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러고 나서 시인은 마루 끝에 앉아 그늘이 담장에 닿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의 길이를, 시계가 아니라 그림자의 이동 거리로 잰다.
그리고 이 시의 심장이 놓인다. 셈해 보면 잃은 것이 언제나 먼저 오고 얻은 것은 늘 뒤늦게 도착한다. 이 두 행은 회계 장부의 문법으로 쓰인 잠언이다. 상실은 언제나 선불이고 회복은 언제나 후불이라는 것. 사별을 겪은 사람, 오래 기다린 사람, 무언가를 잃고도 계속 살아야 했던 사람이라면 이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출 수밖에 없다. 위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문장이다. "언제나"와 "늘"이라는 두 부사가 이 진술을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세계의 순서로 격상시킨다.
쓸지 않음으로써 완성되는 애도
마지막 연은 짧지만 이 시의 결론이 아니라 이 시의 태도다. 노을이 서쪽 처마를 적시는 동안, 시인은 오늘 떨어진 것들을 쓸지 않는다. 마당을 쓰는 일은 정리이고 종결이며 일상으로의 복귀다. 시인은 그것을 하루 미룬다. 아직 애도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두 행이 온다. 감잎 한 장이 마당에 엎드려 제가 누운 자리를 오래 데우고 있다. 떨어진 잎은 죽은 것인데, 시인은 그것이 무언가를 데우고 있다고 본다. 낙엽 아래의 흙이 실제로 조금 더 온기를 머금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의 관찰이면서, 떠난 것들이 남긴 자리가 여전히 따뜻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쓸지 않는다는 선택과, 데우고 있다는 관찰이 만나 애도는 방치가 아니라 돌봄이 된다.
기법에 대하여 — 절제가 만든 밀도
이 작품의 미덕은 대부분 절제에서 나온다. 첫째, 어미가 끝까지 평서형으로 통일되어 감정의 과잉을 차단한다. 둘째, 한자어와 추상명사가 거의 없다. 빨랫줄, 풀빛, 무릎, 발목, 어깨, 감나무, 마루 끝, 담장, 처마, 감잎. 손에 잡히는 명사들만으로 다섯 연을 통과한다. 셋째, 비유가 요란하지 않다. 은유를 앞세우는 대신 사물의 실제 성질을 정확히 관찰하고, 그 정확함이 저절로 상징이 되게 한다. 넷째, 다섯 개 연이 아침에서 저녁, 노을로 이어지는 하루의 시간표 위에 놓여 있어 산만하지 않다.
한 가지 더 짚자면, 넷째 연의 잠언적 진술은 다른 연들의 침묵과 비교할 때 다소 앞질러 말한 감이 있다. 나머지 연이 전부 독자에게 해석을 위임하는데, 이 대목만은 시인이 결론을 먼저 발음한다. 다만 그 문장이 이 시의 무게중심이기도 해서, 흠이라기보다 시인이 감수한 선택으로 읽는 편이 옳다. 이 두 행이 없었다면 시는 더 세련되었겠지만, 더 서늘했을 것이다.
아직 쓸지 않은 자리
이 시를 여러 번 읽는 동안 성경 한 구절이 계속 따라왔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 잃은 것이 먼저 오고 얻은 것이 뒤늦게 도착한다는 넷째 연의 회계와 씨를 뿌리는 시간과 거두는 시간 사이의 긴 간격은 같은 순서를 가리킨다. 성경은 그 간격을 없애 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간격 끝에 반드시 수확이 있다고 말한다. 이 시 역시 상실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굽은 가지마다 붉은 것이 앉는다고, 떨어진 잎이 제 자리를 데우고 있다고 적어 둘 뿐이다.
빨랫줄이 팽팽해지는 날은 대단한 날이 아니다. 바람의 방향이 한 번 바뀌었을 뿐이고, 젖은 것들이 조금 빨리 마르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오래 늘어져 있던 사람은 그 하루를 알아본다. 알아보는 힘이 곧 시다. 이 작품은 그 힘을 큰 소리 없이 증명한다.
당신의 마당에도, 오늘 아직 쓸지 않은 자리가 남아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