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는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분명 마가복음에는 교회란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복음서보다 더 명료하게 교회를 말한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복음이야말로 교회를 뜻하는 중심언어임을 암시합니다. 그렇게 복음이란 의미를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그러니 복음이라고 다 같은 복음은 아닙니다.
마가에게 있어서 복음은 오직 교회와만 연관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인 이유입니다(막 1:1). 초대교회 형성사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가 관점에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모델로 제시하기가 껄끄럽습니다. 왜냐면 고난과 연계된 약속과 이행 여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십자가 고난과 연관된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십자가는 필연 죽음 너머로 이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느냐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니 마냥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희망을 의식할 수 있어야 옳습니다. 그러니 부활 후 제자들과 만남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부활한다고 말씀했습니다(막 10:34).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디에서 만나는가가 관건입니다.
복음서는 저마다 겟세마네 기도 전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된 후 모두가 흩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하나같이 부인하며 끝까지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큰 소리치며 맹세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 중 그 누구도 그 맹세를 지킨 이는 없습니다. 마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도 되듯 십자가를 등졌습니다. 그나마 사도 요한만이 십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뿐입니다. 아무튼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2, 막 14:28)
예수님은 분명하게 갈릴리를 말씀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만날 장소는 갈릴리가 확실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대놓고 예루살렘을 강조할 뿐 갈릴리가 없습니다. 알고 보니 복음서 저자들은 교회를 보는 관점이 서로 달랐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모델입니다. 반면 마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갈릴리 교회입니다. 그래선지 마가복음은 전반부와 후반부 구조 전개과정이 사뭇 다릅니다. 전반부, 곧 갈릴리 사역은 정교하게 이중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사역을 다루는 후반부는 구조 자체가 단순합니다.
물론 예루살렘 여정은 고난이 핵심 주제이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도 자체가 교회 모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마가에게 교회는 갈릴리 교회밖에는 없습니다. 마가에게 교회는 오직 예수님이 중심에 계신 공동체만을 뜻합니다. 마가는 이를 예수님 정체성과 맞물려 교회 의미를 정리합니다. 그렇게 첫째로 죄 사함의 권세를 갖고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또한 둘째는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정체성과 맞물린 교회 원리는 용서와 치유였습니다.
무엇보다 마가는 교회 원형을 에덴 동산교회로 보았습니다. 동산을 적시고 흘러가는 네 개의 강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생명물을 흘려보내는 원천입니다. 그러면 마가가 말하는 세 번째 교회 원리는 무엇입니까? 이를 확인하려면 예수님 정체성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기록된 네 개 사건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 사건들에는 아주 치명적인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이른바 "어찌하여"란 질문이 그렇습니다. 그 질문을 누가 하는지 자세히 확인하십시오. 왜냐면 누가 어떻게 질문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집니다.
질문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예 몰라서 묻는, 그야말로 답을 구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질문은 그런 질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알면서도 상대방 의중을 떠보기 위해 던지는 질문도 있습니다. 마가가 제시한 네 개 사건에 나오는 질문은 모두 이 유형입니다. 질문하는 자가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지 모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서기관들이 그랬고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 질문은 확인을 넘어 확신이었습니다. 내 뜻과 다르면 틀렸고 단정하고 심지어 단죄하기까지 합니다.
본문은 질문하는 주체가 요한의 제자들까지 확대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금식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연관됩니다. 금식은 믿음과 연관된, 따라서 제자라면 해야 할 당위 명령입니다.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 제자는 순종입니까, 불순종입니까? 이는 금식하지 않으면 불순종한 자임을 전제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툭 던진 질문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막 2:18)
예수님은 금식을 결코 부인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금식할 때가 온다고 했고 그때는 금식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냐면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 집 손님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요약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 정체성이 혼인 잔치 주인공인 신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숱한 관계에서 혼인은 어떤 의미입니까? 거의 으뜸이라 할 만큼 중요한 관계가 혼인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신랑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누가 신부이며 하객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혼인 집에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혼인 집만큼 즐겁고 기쁜 자리가 흔하겠습니까? 그러니 신랑이신 예수님과 연관된 교회 원리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기쁨의 원리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원래부터 잔치 한마당이어야 맞습니다. 설레임과 흥겨움이 어울린 즐거운 교회여야 맞습니다. 아울러 잔치 한마당이 의미하는 바 먹거리도 풍성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말하는 먹거리는 어디까지나 영의 양식을 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풍성하게 나누는 영적 교제가 필수입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그냥 먹거리도 많다면 감사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왕짜증 성도가 늘어남은 웬일입니까?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먹거리가 없어 헐벗는 성도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즐거워야 할 예배가 어쩌다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영의 양식을 달라는데 세상 이야기들만 잔뜩 늘어놓는 교회가 어디 한둘입니까? 그래선지 분명 예배 중인데도 예배가 그립다고 하소연하는 이가 여전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진 예배 현장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하는 예배겠습니까? 예배 회복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아는, 그 믿음에서 출발하지 않겠습니까? 그 주님과 함께함이 교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