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신학에서는 교회를 주로 천상교회와 지상교회로 나눕니다. 천상교회는 완전한 교회이며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반면 지상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이며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성경신학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봅니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누구를 예배하는 공동체입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공동체 아니겠습니까?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예배라면 유대교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 정체성은 예수님을 예배하는가로 판가름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예배하면 교회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어떤 교회라도 예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만큼 예배라는 잣대만으로 교회를 구분하기는 모호합니다. 반면 그 예배 구성원, 곧 성도를 확보하려면 필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전도와 교육과 교제입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는 이들 주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가 주는 장점은 한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단점도 제법 많습니다. 그러니 관건은 언제 장점이 나타나며 언제 단점이 노출되는가입니다. 결국 쟁점은 교회 분위기를 좌우하는 영성입니다. 역동적인 교회라면 모든 게 긍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 침체라면 저잣거리의 패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영성이 무너지면 모이는 교회는 난장판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성도라면서 인신공격을 비롯한 약점 찾기에 골몰합니다. 그러니 거룩한 예배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분명 예배하러 왔을 텐데 사람 숫자만큼이나 주님이 다른가 봅니다. 그렇게 하나인 교회는 사라지고 목청만 커집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대부분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큰소리로 말씀하심은 책망할 때였습니다. 그러니 영성이 살아있다면 교회 분위기는 낮은 소리가 맞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낮은 소리로 말해야 합니다. 왜냐면 주님도 우리 마음에 속삭이듯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만 해도 괜찮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주님은 늘 말씀합니다. 복음성가 중에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배를 예배 되게"가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려면, 예배가 예배 되려면 어떻게 해야 맞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됩니다. 예수님만 예배하면 됩니다. 그러니 모이는 교회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인지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모이는 교회라면 예수님만 예배하는지 꼭 점검하십시오.
한국교회는 유난히 모이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런가 봅니다. 예수님만 예배하니 그런가 봅니다. 그런데 이따금 불협화음을 듣습니다. 말씀이 사라진 예배강단을 볼 때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은 읽었는데 뜬금없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심지어 예언자입네 하며 뜬구름 잡는 소리도 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면 모이는 교회는 무용지물입니다. 예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모이는 교회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신약시대 처음 교회는 누가 뭐래도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 예루살렘 교회를 어떤 말로 함축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중 하나가 모이는 교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 그날 하루 회개한 신자가 삼천 명을 넘습니다(행 2:41).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날마다 성장하는 블루칩(blue chip)이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가 예루살렘 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가 무엇보다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성도들이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자가 전한 예루살렘 교회 집회 상황을 조금 비틀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날마다 모였음은 주일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성전에 모였음은 분명 예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 누구도 성전예배를 집례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도 중에 제사장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전예배 집례는 오직 제사장에게만 허용된 특별한 일입니다. 따라서 성전에 모였어도 예루살렘 교회다운 예배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솔로몬 행각"에 모여 기도하고 말씀 전함이 전부였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더부살이 예배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시작되었습니다. 그 마가 다락방이 마가복음 저자인 마가와 연관됩니다. 따라서 마가는 예루살렘 교회 형성과정 전후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 마가가 예루살렘 교회를 어떻게 평가한다고 보십니까? 특히 마가복음을 바울 복음 보완이란 관점에서는 본다면 어떻습니까?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 달리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또한 어김없이 박해가 닥치면 세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죽는 순교 시점을 미루고 또 미루었습니다(빌 1:20-24). 그러니 마가가 바울에게서 본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마가는 바울에게서 흩어지는 교회를 보았습니다.
자, 그러면 마가는 두 교회관 중 무엇을 중심으로 보겠습니까? 모이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흩어지는 교회입니까? 바울 복음 관점에서 보자고 했으니 흩어지는 교회 아니겠습니까? 분명 예루살렘 교회는 모이는 교회에 방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성전에서 모이는데 성전 주체는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교회는 예배다운 예배가 힘겹습니다. 예배 요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전에서는 기도하고 집에서는 찬송과 성찬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강론 역시 각 요소와 맞물려 분산되었다고 봅니다. 상당히 엉성한 예배인데도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구원받는 자를 더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를 체험한 마가 시선입니다. 마가가 그리는 교회는 바울 복음과 맞닿아있다면 말입니다. 그가 이해한 교회관 역시 흩어지는 교회가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해 마가가 드러낸 교회는 갈릴리 교회였습니다. 솔직히 갈릴리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달리 실체가 불분명합니다. 따라서 조직도 확인이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교회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교회란 단어는 없으나 복음을 강조합니다. 더구나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막 1:1).
그러니 예수님이 중심에 계신 교회는 복음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칠 오직 하나는 복음입니다. 복음 말고는 생명을 살리는 구원 역사가 없습니다. 그렇게 마가복음 전반부를 반복 기법으로 구성합니다(막 1:1-6:6). 갈릴리 교회는 형체보다 예수님 정체성을 밝히는데 무게를 두었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렇게 예수님 정체성을 하나하나 밝혀갑니다. 그러자 세상은 교회를 가만두지 않고 박해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박해받는 창조적 소수자였음을 말입니다. 그렇게 전반부를 구성하는 첫 단위가 박해로 마무리됩니다(막 1:1-3:6). 그리고 이어지는 전반부 두 번째 단위 더욱 강화된 박해로 끝납니다(막 3:7-6:6). 그 두 단위를 보면 박해하는 세력이 늘어났음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예수님을 박해하는 세력이 됩니다.
마가가 그려준 전반부 두 번째 단위는 교회가 하는 일, 곧 교회 과제입니다. 마가는 중요한 신학주제를 "샌드위치 용법"에 담았습니다. 샌드위치는 겉에 있는 빵보다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이 더 중요합니다. 마가가 보여준 샌드위치 용법도 그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전체에 깔린 샌드위치 용법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마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샌드위치 용법에 담긴 주제를 조금 알려드리겠습니다. 전반부에는 교회, 후반부에는 고난이 핵심입니다.
자, 그러면 전반부에 있는 샌드위치 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내용입니다(막 3:20-35). 친족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가려고 합니다(막 3:20-21).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부릅니다(막 3:31-35). 그 사이에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블"이라며 공격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진짜 정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서기관들 말대로 바알세블입니까, 아니면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런데 마가복음 전반부에서 샌드위치 용법 특장점은 두 번째 단위에 있습니다. 마가는 교회가 할 일을 샌드위치 용법 두 개로 암시합니다. 첫째는 "거라사 광인"으로 알려진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해질 무렵 예수님은 우리가 저 편으로 가자고 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바다를 건너 되돌아왔습니다(막 4:35-5:21). 그 사이에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이 있습니다(막 5:1-19). 둘째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일입니다(막 5:21-43). 그런데 그 사이에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받은 기사가 있습니다(막 5:25-34). 이 두 가지 샌드위치 용법을 잘 기억하십시오. 왜냐면 이 기사에 마가는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지 담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사건을 보십시오. 그 한 사람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저 건넘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제자들 목숨이 담보된 대가가 그 사람인 셈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살리고자 돼지도 이천 마리나 떼죽음당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을 고쳐주신 목적, 그 속에 담긴 신학주제가 궁금해집니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 5:19-20)
평생 교회만 맴돌면 신실한 신자입니까? 사실은 자라지 못한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이 구원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니 그 사람을 교회 관점에서 정직하게 말해보십시오. 사실은 그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이 파송한 첫 번째 전도자 아닙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흩어지는 교회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꾼 아닙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생명력 넘치는 구원 역사를 드러낸 신자 아닙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교회 관점은 무엇입니까? 천만 성도라며 우쭐대던 교회가 어느새 절반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회복을 위한 대안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교회는 진검승부 시대에 돌입했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참에 우리는 어떤 교회를 그리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당신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까, 흩어지는 교회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