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토니우스가 홀로 고독하게 하나님을 대면하는 독거 수도의 길을 열었다면, 파코미우스(Pachomius, 292?~346)는 그 거친 광야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공동체 수도 생활'의 아름다운 기초를 놓은 인물입니다.
파코미우스는 이집트 테베의 아주 가난한 이방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의 이집트 룩소르(Luxor) 인근 지역이지요. 웅장한 신전과 고대 파라오들의 무덤인 '왕가의 계곡'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관광지이지만, 그 옛날에는 로마 군대의 무자비한 징집과 핍박으로 눈물이 마르지 않던 척박한 변방이었습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원치 않게 로마 군대에 강제로 끌려가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절망과 공포로 온몸을 떨고 있던 그 밤, 전혀 알지 못하던 동네의 기독교인들이 찾아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따뜻한 음식과 옷을 건네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 대가 없는 사랑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군대에서 풀려나자마자 예수님을 영입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도 안토니우스처럼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홀로 도를 닦는 수도사가 되려 했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자리에서 그의 마음을 강하게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홀로 구원받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이곳에 머물며 찾아오는 영혼들을 섬겨라." 그 길로 그는 이집트 나일강 변의 버려진 마을인 타벤니시(Tabennisi)에 자리를 잡고, 찾아오는 이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일하는 최초의 '공동체 수도원'을 세우게 됩니다.
파코미우스 사상의 핵심은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훈련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도를 닦는 것보다, 성격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부딪치며 서로를 참아내는 것이 훨씬 더 귀한 영성 훈련이라고 믿었습니다. 홀로 사막에 있으면 자칫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쉽지만, 공동체 속에 있으면 나의 못난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그는 수도사들이 함께 지켜야 할 규칙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노동과 섬김'이 있었습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하루 종일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친 형제를 위해 묵묵히 부엌에서 빵을 굽고 밭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수도원은 세상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의 도피처가 아니었습니다. 작은 천국을 미리 맛보는 연습장이었죠. 그가 세운 규칙에 따라 수도사들은 낮에는 함께 땀 흘려 농사를 짓거나 돗자리를 짰고, 그것을 팔아 얻은 수익으로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마을 주민들을 구제했습니다. 그의 따뜻하고도 질서 있는 영성을 배우기 위해 수천 명의 제자가 광야로 몰려들었고, 메마른 사막은 어느새 사랑의 온기가 가득한 거대한 영성의 숲으로 변해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독한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상을 보고, 심지어 신앙생활조차 방구석에서 모니터를 보며 혼자 해결하려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사람들과 굳이 부딪쳐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방어벽을 높이 쌓아 올린 탓이지요.
파코미우스가 광야에 세운 공동체는 바로 이런 우리에게 "함께 살아내라"는 묵직한 도전을 던집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까칠한 직장 상사, 명절마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친척들, 혹은 교회 안에서 나와 성향이 전혀 맞지 않아 보기만 해도 불편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뎌내는 것 자체가 바로 가장 숭고한 영성 훈련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어질러 놓은 거실을 짜증 내며 치우는 대신 "이것도 내가 가족을 섬길 수 있는 거룩한 노동이다"라며 슬며시 웃어보는 마음, 조별 과제나 프로젝트에서 무임승차하려는 팀원을 무조건 비난하기보다 그의 어려움을 한 번 더 물어봐 주는 넉넉함 속에 파코미우스의 정신이 살아 숨 쉽니다.
나 혼자만의 안락함을 깨고 나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줄 때, 우리를 짓누르던 지독한 외로움은 사라지고 더 밝고 희망찬 내일이 열릴 것입니다.
허동보 목사(Rev. Huh Dongbo) | 수현교회(Suhyun Church)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AI시대, 히브리어로 답하다』 외














